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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을 담아낸 모네 - 인상주의

by 윤새싹 2020. 7.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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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에 대해 잘 알지 못하지만 좋아하는 그림이 뭐냐고 물으면 바로 대답할 수 있는 것은 바로 클로드 모네의 푸르빌 절벽 위의 산책과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색감이 정말 예뻐서 기분이 매우 좋아지더라구요.

저는 영국 BBC에서 제작한 '빛을 그린 사람들'이라는 드라마를 매우 재미있게 봤는데요. 모네 등 인상주의 화가들의 이야기를 담은 드라마입니다. 그림과 실제 그 장소를 함께 보여주는 장면도 있는데 그림과 실제 장소를 비교해 보는 것이 아주 좋았습니다. 모네의 정원은 꼭 한 번 가보고 싶어지더라구요. 모네의 정원이 프랑스 지베르니에 있다고 하는데, 다음번엔 프랑스 지베르니에 대해서 알아봐야겠습니다.

그럼 오늘은 인상주의와 인상주의의 대표 작가인 모네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빛을 담아낸 모네 - 인상주의

 

《 푸르빌 절벽 위의 산책 》 클로드 모네 (1882)

 

 

인상주의의 시작

인상주의가 시작될 당시에는 살롱이라고 부르는 예술아카데미에서 주관하는 단 하나의 전시회가 있었습니다. 작품을 선보일 수 있는 살롱이 하나였는데다가 이 살롱은 한 해에 한번만 개최했다고 합니다.

19세기 후반에는 화단도 각 경향으로 나뉘어졌기 때문에 그 대립이 극심해졌고, 1863년 살롱의 보수적인 세력들이 혁신적인 작품을 대량으로 낙선시켰습니다. 당시 마네와 휘슬러가 보수 세력에게 낙선 당한 것을 부당하게 여겨 살롱에서 낙선된 화가들을 위한 전시회를 개최했다고 합니다. 그때 마네는 숲속에 피크닉을 간 파리 사람들을 그린 《 풀밭 위의 점심식사 》 라는 작품을 출품하였는데 묘사가 참신함에도 여성들을 나체로 그려 풍속을 문란하게 한다는 평을 받았다고 합니다.

 

2년후 마네는 많은 사람들이 그의 대표작으로 생각하는 《 올랭피아 》를 출품했습니다. 《 올랭피아 》역시 《 풀밭 위의 점심식사 》와 마찬가지로 나체의 여성을 그려 미풍을 해친다며 전보다 훨씬 공격적인 평을 받게 됩니다. 마네는 자신에게 쏟아지는 공격을 피하여 에스파냐로 여행을 떠났고, 그 여행에서 돌아오자마자 전보다 훨씬 과감해진 그림을 그렸다고 합니다. 당시의 청년 화가들은 그의 과감성에 끌려서 마네를 찾았다고 합니다. 1866년 몽마르트의 크리시가에 있는 카페 게르보아에서 마네와 청년 화가들은 그렇게 모임을 시작했습니다. 당시 이 모임은 보불전쟁 때문에 중단하게 되었지만 그 이후에도 계속하여 모이는 화가들끼리의 인상파 전시회가 열렸다고 합니다.

 

 

미술 비평가는 그들을 '인상주의자'라고 비판했다.

1874년 4월 파리. 사진작가 나다르의 화랑에서 작은 전시회가 열립니다. 클로드 모네,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 카미유 피사로, 알프레드 시슬레 등 살롱에서 거절당한 작가들이 참여한 전시회 였습니다.

 

 

《 인상, 해돋이 》 클로드 모네 (1872)

 

 

당시 이 전시회는 평단과 대중들에게 좋은 반응을 얻지 못하였으며, 당시 잡지 《 샤리바리 》의 비평가 르로아가 모네의 《 인상, 해돋이 》라는 그림의 제목에 착안하여 '그저 인상을 그리는 일당'이라며 혹평을 받았습니다. 이는 모네의 그림이 벽지 문양의 밑그림 보다도 못한 그저 막연하기만 한 인상에 불과하다는 부정적인 평이었습니다. 하지만 모네와 그의 동료들은 그의 비판적인 평가였던 '인상주의'를 자신들의 이름으로 받아들였습니다. 

 

비록 '인상주의'라는 것이 당시에는 그들의 그림에 대한 부정적인 평으로 사용되었으나, 그것은 그들을 정확히 표현한 단어였습니다. 인상주의는 빛이 변화함에 따라 형태가 순간적으로 변하는 순간을 포착하려는 것이며, 빛에 따라 변화하는 사물의 인상을 표현한 것이었습니다. 인상주의 화가들은 빛이 변함에 따라 다르게 보이는 사물의 모습을 포착해내기 위해서 주로 야외에서 그림을 그렸고, 그들은 이를 표현해 내기 위하여 시각적인 착시 효과를 이용하는 색채 분할법을 사용했습니다. 이는 인상주의에서 사실적 묘사는 더이상 의미가 없어졌음을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한 미술 비평가의 혹평은 오늘날 19세기 후반의 서양미술사를 대표하는 사조로 쓰이게 되었고, 이러한 인상주의는 서양 미술사에서 대중에게 가장 많이 알려지고 사랑 받는 화풍으로 평가 받고 있습니다.

 

인상주의의 전시회는 1886년 제8회를 마지막으로 끝을 맺게 되었습니다. 그들의 단체 활동은 그렇게 끝을 맞이하게 되었지만, 개인적인 미술적 행보는 계속 되었습니다. 초기 인상주의자의 화풍은 보수적인 아카데미의 화가들의 화풍에서도 보일만큼 자연스러운 것이 되었고, 이는 미술 뿐만 아니라 문학, 음악에도 큰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시시각각 변화하는 빛을 표현한 연작

모네는 1890년 이후 하나의 주제로 여러장의 그림을 그리는 연작을 많이 제작했습니다. 그의 대표적인 연작으로는 《 건초더미 》, 《 루앙 대성당 》, 《 수련 》등을 꼽을 수 있습니다. 모네는 연작을 그리면서 동일한 사물이 빛이 변함에 따라 어떻게 변하는지를 표현해 낼 수 있었습니다.

 

모네가 본격적으로 빛의 변화를 포착하려는 시도는 그의 대표적인 연작으로 꼽히는 《 건초더미 》를 통해 알 수 있습니다. 모네가 거주하고 있던 파리 근교 지베르니의 마을에서 1890년 여름에서 이듬해 봄까지 밀 짚단이 날짜, 계절, 날씨에 따라 달라보이는 인상을 25점의 그림으로 남겼씁니다.

 

1892년부터 2년동안 그리기 시작한 《 루앙 대성당 》 연작의 경우는 30점 이상의 캔버스에서 전시를 위해 20점을 선발했으며, 《 건초더미 》 연작과는 달리 동일한 시점에서 그려졌습니다.

 

모네가 연작을 하면서 표현하고 싶었던 것은 빛의 조건에 따라 달라지는 미묘한 색채의 차이였습니다. 하지만 그 섬세한 차이를 화폭에 모두 담는 것은 사실 어려운 것이었고, 모네 자신도 불가능한 것을 시도하고 있다며 원리적 한계를 토로한 바가 있었다고 하네요.

 

 

《 수련 》 클로드 모네 (1914~1918)  - 파리 오랑주리 미술관에 전시된 모습

 

모네의 정원

모네는 1926년 86세의 나이로 사망하기 전 30여년을 파리의 근교 지베르니에 있는 그의 별장에서 머물렀습니다. 그는 이곳에 연못을 만들어 수련을 심고, 연못 위에 일본풍의 아치형 다리를 놓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만든 연못 위에 핀 수련과 일본식 다리, 정원에 영감을 얻어 250점이 넘는 그림을 그렸습니다.

 

모네는 1908년부터 증상이 심해진 백내장으로 인하여 작업을 쉬어야 했고, 그 때문인지 1920년 이후 그의 그림은 강렬한 우너색의 색이 사용되며 인상주의를 넘어 표현주의에 가까워 졌씁니다. 형태의 붕괴가 급진적이어서 묘사는 순수추상에 가까워졌고,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 수련 》의 연작중 파노라마 작품은 추상표현주의가 등장하자 모네를 추상표현주의의 선구주자로 만들었습니다.

 

이후 추상표현주의의 화가들은 모네의 흔적을 느끼기 위하여 파리와 지베르니로 순례여행을 하거나 아예 근처에 머무리도 했습니다.

지베르니의 작업실에 방치되고 있던 《 수련 》 연작들은 1950년 말부터 세계에서 열린 전시회에서 명성을 얻게 되었고, 모네의 아들이 사망한 후부터 관리가 되지 않고 있던 지베르니의 집과 정원은 1980년대에 이르러서야 클로드 모네 미술관으로 일반인에게 공개가 되었습니다.

 

 

 

출처 : 위키백과, 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 '진중권의 19세기 서양미술사-모네, 인상주의의 탄생', 네이버 지식백과 '사조와 장르-인상주의', 네이버 지식백과 '화가의 생애와 예술세계-모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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