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기 인상주의 미술은 인상파에 속해 있거나 그 영향을 받았지만 그것에서 벗어나 화가의 개성적인 표현을 하기 위하여 인상주의의 화풍을 점점 바꿔나가려고 하던 인물들을 가리킵니다. 당시에는 이에 대한 명확한 명칭이 없었습니다. 후기 인상파(후기 인상주의)라는 명칭이 붙게 된 것은 1910~1911년도에 로저 프라이가 < 마네와 후기 인상파 > 전시회를 영국에서 개최했는데, 이 전시회의 이름에서 유래된 것이라고 합니다. 이 후기 인상파의 대표적인 화가로 세잔, 반 고흐, 고갱이 있습니다.
이 후기 인상주의 미술의 대표적인 세 화가의 화풍은 공통성이 없었지만 20세기 회화의 발전을 준비한 중요한 한 단계로써 볼 수 있습니다.
오늘은 후기 인상주의 미술의 화가중 한 사람에 대해 알아보려고 합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고 있는 반 고흐에 대해서 입니다.
저는 반 고흐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하게 되었던 계기가 있는데요. 바로 제가 좋아하던 배우가 그를 연기했던 드라마를 보게 되면서 입니다. 그 드라므는 '반 고흐, 영혼의 편지'인데요. 제가 느끼기에는 그 배우가 연기하는 반 고흐는 찰떡같이 매우 잘 어울렸고, 점점 매료되었습니다. 그 드라마는 1~2회만 봐서는 안될만큼요. 그래서 여러 회차 드라마를 시청한 뒤 반 고흐라는 인물에 대해 더 알아보고 싶은 마음이 생겼고, 책을 찾아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그의 동생 테오와 주고 받았던 편지를 엮은 책이었는데요. 고흐가 구필화랑 헤이그 지점에서 일을 시작했을 때부터 그가 생을 마감하기까지의 모든 내용이 아주 인상깊었습니다. 그럼 고흐에 대해 알아볼까요!
볓이 빛나는 밤 고흐
유년시절부터 그림을 시작하기까지
종교적 활동과 미술을 추구하던 집안에서 태어난 고흐는 유년시절 내성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었고, 어린이답지 않게 생각이 깊었다고 합니다.
1860년 로마 가톨릭 교회의 성격을 가지고 있는 쥔더르트 마을 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는데, 부모님의 권유로 입학했던 기숙사 학교에 적응을 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학교를 그만둔 뒤 고흐는 자신의 여동생 안나와 함께 3년동안 가정교사에게 교육을 받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3년 뒤 입학한 학교에서도 적응하기 어려웠다고 합니다. 그 학교는 집과 32km 정도 떨어진 곳으로 다녔는데 그것을 무척 싫어했다고 하네요. 그 때문이었는지 몰라도 고흐는 자신의 유년시절을 '우울하고 차가웠던 시간' 이었다고 회상했습니다.
1869년 16살이 된 고흐는 그의 삼촌이 운영하는 구필화랑의 에이그 지점에서 일을 시작하게 됩니다. 당시 고흐는 모범적이고, 성실한 청년으로 화랑에서 인정을 받게 됩니다. 1873년엔 구필화랑의 런전지점으로 발령받아 영국에서 지내게 되었는데, 이때부터 신비주의에 빠져 화랑일에 점점 소홀해 집니다. 1875년 구필화랑의 파리지점으로 발령받아 계속 일을 하였지만, 구필화랑에서는 그가 손님들과 그림에 대한 관점 차이로 자주 다툰다는 이유로 1876년에 그를 해고 합니다.
성직자의 길을 원했던 고흐는 파리를 떠나 영국의 램스케이트로 갔습니다. 그곳에서 그는 매일 같이 성경을 탐독했고, 설교 활동을 하면서 복음 전도사가 되기 위해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그렇게 램스케이트에서 견습교사가 된 그는 후에 1877년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으로 돌아와 목사가 되겠다는 꿈을 가지고 신학대학에 들어가기 위해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신학대학에서 낙방을 하였고, 전도사 양성학교에서 마저도 그의 자질이 부족하다며 6개월간 평신도로 전도 활동만을 허가하였다고 합니다.
그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벨기에의 가난한 광산촌이었던 보리나주로 건너갔습니다. 그는 오두막에서 생활하면서 그곳의 최하층민의 생활을 직접 경험하며 전도활동에 노력을 기울였지만 그의 광신도적인 기질과 격정적인 성격탓에 교회로부터 전도사로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는 보리나주로 간지 6개월만에 해고되었고, 보수 없이 일을 계속 하면서 목탄화를 그리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1880년에 그의 동생 테오는 고흐에게 그림을 그려보면 어떠냐며 제안하였고, 그는 그 제안을 받아들여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고흐는 드로잉에 관해 기초가 부족했기에 헤이그에서 안톤 모브에게 그림 수업을 받습니다. 짧은 기간동안 그에게 수업을 받았지만 빛을 다루는 방식과 거친 붓자국 등 그의 화풍에 많은 영향을 주게 되었죠.
화가로서의 삶의 시작
고흐는 브뤼셀, 헤이그, 앙베르 등지에서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주로 노동자, 농민 등 하층민의 생활과 풍경을 그렸으며 이 무렵 작품이 바로 《 감자 먹는 사람들 》(1885) 입니다.
그의 화풍이 렘브란트와 밀레풍의 어두운 화풍에서 밝은 화풍으로 바뀌게 되는데, 인상파의 밝은 그림과 일본의 우키요에 판화를 접하게 되면서부터 입니다. 특히나 그는 일본화에 매료되어 작품을 모으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이 무렵부터 그의 자화상을 많이 그리기 시작했는데, 그 중 몇몇은 일본화를 보여주는 배경을 설정해 놓고 그렸다고 합니다.
이 그림은 고흐가 그린 회화들 가운데 비교적 큰 사이즈에 여러 그림을 그려 넣은 최초의 그림이라고 합니다. 이 때 고흐는 밀레처럼 농촌의 애환을 그리는 농민 화가가 되고 싶어했습니다. 그래서 농부들의 일상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여 그림에 진실을 담으려고 했습니다.
프랑스 아를
그가 파리에 생활하면서 대도시의 생활에 실증을 느껴 1888년 2월 프랑스 아를로 거처를 옮깁니다. 아를로 이주한 후부터 그가 사망할때까지 2년 반동안 《 아를의 도개교 》, 《 해바라기 》 등과 같은 그의 많은 명작이 탄생했습니다.
이곳에서 고흐는 새로운 예술촌을 꿈꾸며 고갱과 베르나르에게 이곳으로 올 것을 끈질기게 권유했고, 그리하여 폴 고갱과 공동 생활을 하게 됩니다. 하지만 고흐와 고갱의 성격차이가 심각하여 생활이 순탄치만은 않았다고 합니다. 그해 12월 고흐는 정신병 발작을 일으켜 고갱과 싸운 뒤 자신의 한쪽 귀를 잘라 아를의 사창가에 있는 매춘부에게 그것을 건냈다고 합니다. 이를 받은 매춘부는 고흐를 경찰에 신고 했고, 신고를 받아 고흐의 집을 방문한 경찰은 그를 병원으로 이송했습니다. 그 일이 있은 후 고흐는 발작과 입원을 반복하는 생활을 하였고, 발작이 없을 때는 공백을 메우려는 듯 미친듯이 그림을 그렸다고 합니다.
"푸른 밤, 카페 테라스의 커다란 가스등이 불을 밝히고 있어. 그 위로는 별이 빛나는 파란 하늘이 보여. 바로 이 곳에서 밤을 그리는 것은 나를 매우 놀라게 해. 검은색을 전혀 사용하지 않고 아름다운 파란색과 보라색, 초록색만을 사용했어. 그리고 밤을 배경으로 빛나는 광장은 밝은 노란색으로 그렸지. 특히 이 밤하늘에 별을 찍어 넣는 순간이 정말 즐거웠어."
고흐는 이 무렵에는 밤중에 작업을 하는 것을 즐겼다고 합니다. 이 카페의 실내를 그렸던 《 아를의 밤의 카페 》 같은 경우는 3일 내내 밤에 그린 그림이라고 하네요.
노란색으로 채색한 카페의 차양막과 파란색, 보라색, 초록색만을 사용하여 그렸다는 하늘, 꼭 눈송이 같은 별이 매우 아름다운 그림입니다. 이런 쨍한 색감 때문에 고흐의 《 밤의 카페 테라스 》도 제가 좋아하는 그림중 하나입니다!
고갱과 다툰 후 자신의 귀를 자른 사건 이후 생레미 요양원에 있을때 그린 그림이라고 합니다. 고흐의 대표작으로 뽑히는 그림 중 하나이죠. 병실 밖으로 내다보이는 밤 풍경을 기억과 상상으로 그려냈는데, 이는 자연에 대한 고흐의 내적이고 주관적인 표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고흐가 그린 밤하늘에서는 구름과 대기, 별빛과 달빛이 폭발하는 듯 둘레에 뿌옇게 표현이 되었고, 황량하고 짙은 파란색 하늘은 세상의 종말까지 연상케하며 그 위로 구름이 소용돌이치며 떠있습니다. 수직으로 곧게 뻗어 땅과 하늘을 열결하는 듯한 사이프러스는 예부터 무덤이나 애도와 연관된 나무이지만 당시 고흐는 죽음을 불길하게 생각하진 않은 것 같습니다.
이 시기 그의 화풍은 더욱 두꺼워지고 회오리 치듯 꿈틀거리는 붓터치가 강렬한 색과 만나 더욱 강렬하게 표현되었습니다.
확실히 《 밤의 테라스 》 에서보다 붓터치가 훨씬 더 거칠어졌고, 색감또한 많이 어두워진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자신에게 총을 겨눈 고흐
1890년 5월. 파리의 근교 오베르에 있는 의사 가셰에게 찾아가 건강이 조금 회복하는 듯 했으나 다시 쇠약해져버린 고흐는 결국 자신의 가슴에 권총을 겨누게 됩니다. 그 자리에서 사망할 정도는 아니였지만 그 총상은 그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내고 맙니다. 그는 이틀동안 심하게 앓다가 37세의 나이로 사망합니다. 그리고 몇 개월 뒤 고흐와 깊은 우애를 나눴던 그의 동생 테오도 매독을 앓다가 사망을 했고, 두 형제는 나란히 묻히게 됩니다.
"그것에 돌아가는 나는 그림을 그렸다. 붓이 내 손에서 빠져나가려는 것 같았다. 나는 어렵지 않게 슬픔과 깊은 고독을 표현했다."
고흐의 최후작 중 하나로 알려져 있는 이 작품은 그가 자살하기 직전 1890년 7월 오베르에서 그려졌으며, 일부의 연구에 따르면 바로 이 장소에서 고흐가 자신에게 총을 쏜 곳이라고 합니다.
이 그림에서는 더이상 그가 예찬했었던 자연의 요소들이 보이지 않고, 밀은 더이상 부드럽게 살랑거리지 않으며 하늘은 어두워졌고, 까마귀 떼들은 죽음을 예고하는 듯 보이며 그가 느꼈을 절망감이 고스란히 느껴집니다.
유작전 이후 명성을 얻게 된 고흐
고흐는 살아생전 자신의 작품이 인정받지 못한다는 것에 많이 힘들어 한 것을 내비치면서 어떤 예술작품이 그렇듯 죽어야 인정을 받고, 명성을 얻을 것이라고 테오에게 쓴 편지가 있습니다. 그의 말대로 당시 고흐의 작품은 그의 살아생전에는 인정을 받지 못했고, 그가 사망한 뒤 1903년에 열린 그의 유작전 이후로 명성을 얻게 됩니다.
고흐의 그림은 동생 테오가 대부분 소장하고 있었는데, 테오마저 사망하고 나자 테오의 부인과 아들이 작품을 관리했고, 암스테르담에 있는 반 고흐 미술관에 공개했습니다. 이 미술관에는 《 해바라기 》, 《 아를의 침실 》, 《 자화상 》, 《 까마귀가 있는 밀밭 》 등 고흐의 유화 200여 점, 소묘 500여 점, 700통 이상의 편지, 고흐가 수집한 요키요에화 회화 등이 전시되어 있다고 합니다.
고흐와 테오가 주고 받았던 650여 통의 편지는 1914년에 출판되었다고 합니다. 그 편지에서 화가의 삶에 대한 많은 통찰을 보여주었고, 무명화가로서의 고단한 삶의 슬픔이 잘 묘사되어 있습니다.
출처 : 위키백과, 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 '죽기 전에 꼭 봐야 할 명화 1001점-까마귀가 나는 밀밭', 네이버 미술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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